산악인 고미영 실족사 클라이머

故 고미영.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의 산악인.

오은선과 함께 한국 산악인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다. 160cm의 작은 키와 50kg 남짓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8000m급 3회 연속 등정은 국내 산악인 최초로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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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추구하는 동안 더 눈에 띄는 성공을 남긴 것은 등반 분야였습니다. 김자인 이전에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암벽 등반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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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업적과 죽음을 기리며 그녀를 든든히 지원한 코오롱스포츠는 매년 고미영배 유소년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를 개최해 등반가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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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프로필 바로가기


고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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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7년 7월 3일

고향 : 전라북도 부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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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2009년 7월 11일 (42세)

파키스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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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추정 시간은 오후 10시 30분이었다.

그녀가 1000m 이상에서 1시간 30분 이상 추락하고 살아남았다면 사망일은 7월 12일이지만 헬기가 발견된 7월 12일 오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여 언제 사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시신은 악천후로 인해 7월 16일에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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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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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

등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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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상명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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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

2009 대한산악협회 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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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경력

2009.07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 11개 봉우리 등정

2009.09.06 히말라야 다울라기리(8167m) 7개 대륙 3개 봉우리 등극



슬픈 마지막

2009년 7월 11일에는 뛰어난 등반 기량을 보였고, 2009년 7월 11일에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에서 하산하던 중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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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그는 1,000미터 이상 떨어져 중앙에 튀어나온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한다.

사실 발견 당시 머리의 손상이 매우 심했고 피도 많이 흘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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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고인에게 체육유공훈장을 추서했고, 대학산악회와 고향인 부안군은 고인을 애도하고 부안체육공원에 ‘고미영 동상’을 세웠다.


2012년에는 대한산악연맹 창립 50주년을 맞아 ‘산악계를 빛낸 5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고인은 상명대학교 체육대학원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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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14봉을 모두 제패하고 그의 등정을 책으로 저술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불행한 죽음으로 인해 이 책은 영원히 출판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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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가로서의 삶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림수산부에 임명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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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나 암벽등반과 무관한 삶을 보낸 1989년 북한산 첫 등정은 산악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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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오르막이었지만 오르막 중간 갈림길에서 남들이 자주 걷는 안정적인 백운대 대신 거칠고 가파른 만경대 능선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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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을 마친 그는 실내 등반 센터를 찾아 등반가로서의 출발을 알렸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암벽등반에 적합하지 않아 암벽등반센터에 다니고 책도 사고 조언도 해주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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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몸무게 70kg이 넘고 키가 160cm였기 때문에 대부분 남성이었던 암장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등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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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꾸준한 훈련과 노력 끝에 20kg을 감량했고 코오롱등산학교를 졸업한 후 점차 유명해졌다. 고된 노력 끝에 1993년 제1회 국내 등반대회에서 6위를 하고 2년 만에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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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 그녀가 단순한 공무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고난 재능과 등반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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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등반선수권대회 여자부 9연승을 휩쓸었고, 등반가로 활동할 당시에는 경쟁자가 없었던 국내 정상급 등반가였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6번의 우승과 4번의 준우승을 달성한 아시아 무대의 최강자이기도 하다. 세계 무대에서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유력한 선두 주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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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랭킹 5위와 6위를 기록했지만 세계랭킹 5위 안에 가장 강한 여성등반자들이 등장하는 등 남성 등반가들의 세계도 거의 희박한 모습을 보여 놀라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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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에 관직을 떠났지만 23세에 등반계에 입문해 한국과 아시아를 제패하고 공무원과 등반가를 동시에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 더 일찍 접었다면 세계를 정복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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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한국에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됐다. 2002년부터는 빙벽 등반이라는 조금 다른 분야에 도전했지만 세계선수권 4위, 월드컵 5위 등의 성적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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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으로서의 삶

이후 한국나이 39세가 된 2005년 등산에서 산악인으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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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엄홍길, 박영석으로 대표되는 산악인들이 등반가들보다 대중에게 더 잘 알려지고 사랑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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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는 파키스탄(6447m)에서 드리피카(6447m)를, 2006년에는 한국나이 40세의 나이에 타고난 재능이 어디 가지 않은 듯 14개 8000m 봉우리 중 가장 쉬운 중국 추유산을 등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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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악계의 최대 행사 중 하나인 14위 입상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늙어서 산악인의 출발을 알렸지만, 등산계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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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 14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당시 세계에서 14석을 모두 정복한 여성이 없었고, 클라이머로서의 신체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으며, 그녀의 근면성실함과 지구력이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콜론의 강사. 등산학교를 운영하는 코오롱스포츠가 후원을 맡으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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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코오롱의 힘찬 응원이 이어지면서 14개 봉우리 중 3개 봉우리인 에베레스트, 브로드피크, 시샤팡마를 일제히 등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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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이 된 지 2년 만에 1년 만에 14개 봉우리 중 3개를 오른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그 시점부터 언론은 14번째 자리에 오른 최초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것을 그다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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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미영은 당시 또 다른 한국의 유명 산악인 ​​오은선의 후원자였던 블랙야크에게 위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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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선은 한국 산악계에서도 꽤 유명한 선수였고, 특히 오은선을 제치고 최초의 여자 14개 왼발 선수 에두르네 파사반을 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블랙야크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다. 2001년부터 꾸준히 14위를 차지한 이탈리아 출신. 엄청난 속도로 나와 함께 등반하는 고미영의 존재는 두렵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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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세계 최초 14점짜리 여성 클라이머로 피쳐링된다면 홍보 효과가 클 것이고, 이 홍보 효과를 누리지 못한다면 아웃도어 브랜드의 경쟁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피 흘리는 경쟁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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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더 이상 오은선vs고미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은선/블랙야크 vs 고미영/코오롱 대결이 양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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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등반은 동네 뒷산에 비하면 엄청난 비용이 들며, 오은선과 고미영도 전문 산악인으로 2009년부터 어느 기업에서나 임원급 연봉과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다. 명예와 경제적 파급력은 막대할 것이고, 그 시점부터 진입과 퇴출을 위한 경쟁은 불가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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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캠프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지만 베이스캠프까지 필요한 장비를 운반하는 비용과 네팔 정부에서 부과하는 등산비처럼 한 푼도 들지 않는다. 이는 한국처럼 기업이 경쟁사의 후원을 받지 않는 한 개인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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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영의 경우 산악인이 된 지 3년 만인 2008년 로체, K2(산), 마나슬루 등을 2년 만에 14개 봉우리 중 6개를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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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선은 2008년까지만 해도 마칼루, 로체, 브로드피크, 마나슬루를 등정해 고미영보다 한 계단 더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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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오은선이 등정한 가셔브룸, 시샤팡마, 에베레스트 등의 경우 거의 9년 만에 달성했다. 그 속도로 달리는 등반가는 1년에 4개를 올랐으니 완전히 오버페이스였고, 그가 14번째 등반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알피니즘의 감각을 찾을 수 없는 클라이밍 위주의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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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도 끝없는 경쟁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오은선은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 낭가파르밧, 논란의 칸첸중가 등 4개 봉우리를 등정했고, 고민영은 2009년 마칼루, 칸첸중가, 다울라기리를 등정해 드디어 낭가파르밧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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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미영이 낭가파르밧에서 내리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서 이 끝없는 경쟁은 비극으로 끝났다. 고미영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2010년, 오은선은 14개 포지션의 최종 상대인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며 대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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